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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던시 전시 ] 2019 창제작 발표 프로젝트 5. 차승언,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

전시기간
2019-06-20 ~ 2019-07-07
시간
12:00 - 18:00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창고 갤러리
관람료
무료
문의
032) 760-1018


2019 IAP 창·제작 발표 프로젝트 5.
차승언,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
(disheveled~disheveled)>


인천아트플랫폼은 2019년도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입주 예술가 창제작 프로젝트'를 통해 10기 입주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합니다. 다섯번째 프로젝트로 차승언 작가의 개인전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을 진행합니다.

차승언 작가는 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직조에 추상회화를 결합한 평면과 입체작업을 선보여왔습니다. 이번 전시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은 작가가 지금까지 작업을 위해 따랐던 직조의 규칙과 기술을 돌이켜보고, 익숙해진 기술에 경계하며, 매체 사용 방식에 대한 고민을 위반의 행위와 과정으로 선보입니다.


차승언,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 (disheveled~disheveled)>

일 시 : 2019 6 20일(목) ~ 7 7(일), 12:00~18:00
장 소 : 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


# 전시소개/작가노트

직조 기술에 추상회화의 양상을 결합한 기존 작업은 늘 평면이나 입체의 모습으로 전시되었다. 그 모습, 모양은 실(thread)에 가해진 특정한 반복 행위의 결과물이다. 반복과 축적으로 작업이 만들어지는 것은 프로세스 예술과 연결해서 설명 할 수 있지만, 작업을 이어가는 큰 줄기에서는 부수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직조행위 과정을 전면에 내세워 전시한 적은 없다.

직조기계를 잘 다루고 직조 기술에 특화된 동작에 익숙해지는 것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러나 한편, 행위가 몸에 달라붙어 의식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노동의 강도가 세지면, 기계적 행위와 관습적 매체 사용이 작업 전반을 압도한다. 행위의 숙련도가 한계로 남지 않을 수 있으려면, 섬유예술 아카데미즘이 가지는 완성도에 대한 강박이나 구속을 재인식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반드시 지켜왔던 직조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고 그 규칙들을 위반하는 행위와 과정을 전시하게 되었다.

조건1. 세로실은 끊어지는 실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조건2. 세로실은 동일한 장력을 가져야 한다.

조건3. 세로실은 동일한 두께를 가져야 한다.

조건4. 세로실은 바디 한 칸에 동일한 개수가 들어가야 한다.

조건5. 직조가 완성 되는 동안 세로실을 변경할 수 없다.

조건6. 세로실이 바디에 걸리는 간격은 동일해야 한다.

조건7. 가로실은 끊어지는 실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조건8. 가로실은 직조 시 일정한 폭을 유지해야 한다.

조건9. 가로실은 세로실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건10. 가로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등의 조건을 위반한다.

규칙의 확실성에 틈을 내고 매체 사용을 반성하며 행위, 매체, 시각성의 관계를 새롭게 경험하길 바란다.


#평론글

신, 인간, 장치 / 윤율리

그림에는 정념(passion)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동굴 속의 원시 회화나 오래된 주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즉, 여기서 나는 사변적이고 비밀스러운 관념들을 정념에 대하여 가장 먼 곳에 두고자 한다. 정념은 인상이다. 인상 중에서도 특별히 뜨겁다. 사랑, 미움, 긍지, 비탄, 질투, 긍휼함과 주저함… 우리가 그림을 보며 흔히 이런 인상의 목록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난스럽지 않다. 정념은 주로 물감의 형태로 그림 표면에 발려 있고, 그림이 아닌 그림 바깥에서, 그린 이의 활시위를 떠나 보는 이에게 닿으려는 발사체 혹은 그 운동에너지처럼 출현한다. 이것이 스펙터클이나 숭고의 체험으로 오인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몸짓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정념은 그리는 이의 몸짓이다. 몸짓들은 형과 색으로 가득 찬 단면을 통과해 보는 이에게로 쏘아져 날아온다.

그렇다면 몸짓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림 앞에서 쉽게 간과하는 점은 그림이 결과적으로 2차원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는 이는 3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공중에 드론을 날리려는 사람은 이것이 RC카를 조종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뮬레이션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금세 눈치챌 것이다. 여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초심자들은 꽤 많은 시간을 쓴다. 드론이 허공의 한 점에서 점으로 무선 송신기를 통과한 전파 신호를 담고 날아가듯 붓질은 화가의 의지를 담고 x, y, z축으로 뻗어나간다. 요컨대 그리기라는 말은 들이붓고 휘두르고 뽑아들고 올려붙이고 뿌리고 내리찍는다는 뜻이다. 왕자웨이 영화의 비무처럼. 우리는 칼이 한 번 맞부딪힐 때마다 사랑, 미움, 긍지와 비탄이 함께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이보다 명확한 근육은 없다.

차승언의 그림은 차갑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찍이 미술의 용례에서 뜨겁거나 차갑다는 말은 추상의 몇 가지 경향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온도의 대비는 넓은 범주에서 아주 유의미한 차이를 가시화하진 않는다. 어쩌면 차가운 그림은 정념이 사라진 그림일지도 모른다. 정념이 사라졌다는 말은 몸짓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잠깐,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가능한가? 만일 몸짓이 사라진 상황이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상상 불가능한 모순이라면 여기서 몸짓은 무엇으로 또는 어떤 다른 몸짓으로 대체되고 있는가?

차승언은 그림을 짠다. 짓는다거나 기워낸다거나 엮는다고 써도 좋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회화의 바탕이 일반적으로 흰색 직물이라는 사실은 그림을 감상하는 활동에서 쉽게 잊힌다. 우리는 직물을 여러 형태로 활용하고 있고, 심지어 아무렇지 않게 입거나 걸치고 있고, 따라서 직물을 직물이라 생각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아무튼 그렇다. 물론 점잖은 미술사가들이 사소한 직관의 대비로 무언가를 뜨겁다고 혹은 차갑다고 말하듯 직조된 그림과 그려진 그림의 대단찮은 상이함은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직조의 몸짓이다.

직조는 몸짓을 장치로 대체한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상황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그 어떤 몸짓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는 전제 하에, 몸짓을 대신하게 된 기계를 다루는 새로운 몸짓의 등장이다. 먼저, 인간은 커다란 피아노를 연상시키는 직기 앞으로 다가가 앉는다. 가로실을 북에 감아 한 올씩 밀어 넣는다. 하나의 줄이 딸려와 쌓이도록 바디를 당긴다. 한 올씩 밀어 넣는다. 당긴다. 밀어 넣는다. 당긴다. 넣는다. 당긴다… 우리는 이것을 관찰하면서 그리는 일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짐작한다. 직기를 사용하는 몸짓은 옆으로 앞으로, 가로로 세로로, 그것이 그래야하는 만큼 이동한다. 시간은 유한하게 앞으로 흐르며 정해진 순서는(이미 실이 걸린 직기가 토해내는 그림의 크기와 형상은) 뒤바뀔 수 없다. 몸짓이 몸짓을 대신하는 순간 정념은 차갑게 식는다. 이 푸른 불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것은 냉담함과는 다른 아파테이아(apatheia)다. 직기 앞에 앉은 인간에게는 의지가 정념에 앞선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구원에 관한 운명론은 아니다. 직기는 다만 인간에게서 먼 일과 가까운 일을 분별하고 두 섭리를 구분하고자 하는 이원론적 질서다. 직기를 다루는 몸짓은 초월적인 로고스를 실재 세계에 실현함으로써 그것을 증거한다.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더욱 엄격한 관점에서 그리는 (인간의) 몸짓을 대신하게 된 기계의 몸짓이다. 기계의 몸짓이라니! 이 말은 꽤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기계를 그림 그리는 이로 호칭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불온하다. 기본적으로 기계는 일이 직면하는 “세계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기계는 어떠한 일을 하기에 좋다. 화살은 순록을 죽이기에 좋고, 쟁기는 토지를 다루기에 좋고, 풍차는 곡식을 빻기에 좋다.” 이것에 연결되는 함의는 “순록은 죽어야 하고, 땅은 가공되어야 하고, 곡식은 밀가루가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종교적인) 견해일 테다.1)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기계의 몸짓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 좋은가? 기계가 좋아질수록 그림은 좋아지는가? 좋음은 윤리의 지평이다. 1790년 이후 우리가 어떤 그림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가? 곡식이 빻아져야 하는 것처럼 그림은 그려져야 하는가? 플루서에 따르면 이 같은 질문은 역사를 곤경에 빠트린다. 역사는 일하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고 이를 위해 우리는 (그게 무엇이든) 수단을 넘어 진실한 예언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계는 평온한 질서에 난입해 이 모든 공정을 중단시킨다. 차승언의 그림은, 아니 차승언과 차승언의 장치가 그린 그림은, 이러한 이율배반 속에 던져진다. 신성한 역사의 몸짓과 부조리한 역사 바깥의 몸짓을 하나의 직물로 기워내며.


1) 빌렘 플루서(안규철 역), 『몸짓들』, pp.19-pp.24, 워크룸 프레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