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기 장서영] 백(百)의 그림자 One Hundred Shadows
2018-07-17(Tue) ~ 2018-07-29(Sun)
성북예술가압장, 공간가변크기
장서영, 권세진, 박예나, 임노식
전시 《백(百)의 그림자》는 외부의 시선으로 규정되어 온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무심코 범주화하였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출발은 사회에서 관계하며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사회에서 부여받은 이름과 역할, 정해진 규범과 규칙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 현실과 존재가 마주하는 그 경계에서 끊임없이 불안감과 위태로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현실 안에서 반응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의 모습들을 소설 『백(百)의 그림자』(황정은 作) 속 그림자를 모티브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소설 『백(百)의 그림자』에는 ‘그림자가 선다.’, ‘그림자가 존재를 덮친다.’ 등 그림자를 둘러싼 다양한 묘사가 등장한다.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존재론적 불안을 느낄 때 그림자는 이에 반응하여 존재를 잠식하거나 분리되어 떠나간다. 여기에서 ‘그림자’는 모든 존재가 지닌 숙명적인 자기 몫의 어둠이다. 완연한 어둠에 몸을 포개 스스로 그림자가 되거나, 현실을 떠나 유령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그림자와 발을 맞대며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그림자는 존재가 안고 가야 할 어둠인 동시에 존재 이면에 달라붙어 흔적을 남긴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시는 성북예술가압장, 공간가변크기 두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그림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권세진, 박예나, 임노식, 장서영 작가의 회화,설치, 영상 등의 작업을 통해 선보인다.
권세진 작가는 주변을 둘러싼 현실 풍경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아파트 풍경을 그려낸 신작 <거주지>(2018)는 존재를 둘러싼 빛과 어둠이 현실의 삶과 융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켜켜이 쌓아올린 먹의 농담과 명암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그의 작품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우리 주변 존재들의 삶을 담아낸다. 그밖에도 작가는 유년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학교 풍경 시리즈를 선보인다. 집단화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중첩되어 있는 그의 그림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어릴 적 시스템 안에서 통용되던 공통의 기억과 그 시절 분위기가 떠오른다.
임노식 작가는 일상 속 미묘한 다름에 주목하며 사적 경험과 자신의 감정을 중첩시켜 수면화 된 풍경을 그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림자를 숙명적인 어둠과 현실의 흔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림자의 다양한 모습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 이는 그림자를 통해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의 감각과도 연결된다. 약 5m 높이의 신작 <Screenshot_5>(2018)는 작가의 작업실을 그린 작품이다. 작업실은 작가에게 있어 가장 밀접한 현실이자 소우주이다. 하지만 작품이 빠진 채 텅 비어있는 공간은 그를 둘러싼 현실의 사족들을 걷어내고 실재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 이면의 원형(原形)들을 상상하게 한다.
박예나 작가는 하나의 이름, 완결된 구조로서 치환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오브제나 존재들을 만든다. 이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한 형태>(2018) 신작에서 작가는 사물들의 모양과 특징을 추출, 조합하지만 이는 결코 ‘무엇’이 되지 않는 미완결 형태의 조형물이다. 관람객은 하나의 조형물을 관람하게 되지만 보는 각도, 위치에 따라 유용한 물건이 되기 전 사물의 다면적 형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유효한 효용 방식을 규정지으려는 것을 거부하고 완결된 형태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의문을 가졌을 작가의 생각과도 부합한다. 이처럼 작가는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탈하고 뛰쳐나가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일견 위태로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포섭의 경계에서 삭제된 존재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일순간 드러낸다.
장서영 작가는 사회구조 아래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퍼포먼스와 텍스트 기반의 영상, 설치 작업을 한다. 작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범과 호명 아래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상 <반복되어 익사하는 곰 이야기>(2013)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규칙 아래 반복적으로 익사하고 되살아나는 곰의 이야기이다. 텍스트 기반 영상 작업 <우물>(2010)은 그림자에 의해 먹히는 개인들처럼 서서히 그 존재가 허물어지며 이윽고 하나의 덩어리로 변모한 우물 속 괴물을 묘사하며 완연한 어둠에 몸을 포갠 존재의 그림자를 묘사한다.
이처럼 네 명의 작가는 작업을 통해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그들의 시선은 공통적으로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과 맞닿아 있다. 이는 사회 규범과 규칙의 범주 아래 점차 흐려져 가는 존재 본연의 모습들을 만나려는 시도이자 단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불안하지만 진솔한 모습으로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백(百)의 존재들과 그림자를 전시장에서 마주하길 바란다.
출처: 공간 가변크기 (http://dimensionvariab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