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6(Thu) ~ 2023-11-12(Sun)
화 - 일 11:00~18:00(매주 월요일 휴관) Tue - Sun 11:00 – 18:00 (Closed on Mondays)
G3 프로젝트 스페이스2
무료
032-760-1000
2023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창제작 프로젝트
배윤환 BAE Yoonhwan
박싱 데이 Boxing Day
2023. 10. 26. – 11. 12., 화-일 11:00~18:00
인천아트플랫폼 프로젝트 스페이스 2(G3)
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입주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창·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23년 시각예술부문 여섯 번째 프로젝트로 입주 예술가 배윤환의 개인전 《박싱 데이(Boxing Day)》를 개최한다.
배윤환은 최근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환경적 이슈에 대한 회화적 발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킨 영상 및 설치 작업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구체화하고 있다.
전시 《박싱 데이》는 최근 작가가 작업실과 집을 이사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작업실의 위치에 따라 작업 횟수나 시간에 영향을 많이 받기에, 이사할 곳은 신중하게 찾고 준비했다. 이사의 가장 어려운 점은 필요한 물건이나 보관하고 있는 작업을 포장하여 옮기고, 다시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이동을 위해 언제나 작업실에 대기 중인 상자들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이사 후에는 아직 풀지 못한 짐들 사이, 어떤 물건이 있는지 뒤적거리고 찾는 일이 수반된다. 무거운 박스들을 들었다 놨다, 여닫는 일이 반복될수록 박스 외부에 적은 글자와 박스 안 내용물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많아진다. 작가는 물건의 위치마저 잊는 일이 빈번한 혼잡한 시간을 겪으며, 구입한 물건이 박스 안에서 중복해서 발견되면 자신에게 짜증을 내다가 찾던 것을 마침내 발견한 순간 스스로가 대견해 환호하기도 했다. ‘박싱 데이’는 유럽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담은 상자를 주었던 성탄절 다음날(12월 26일)을 의미한다. 이날은 서로 나누고, 베풀며 사랑을 전했던 아름다운 하루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 선수들이 쉴 틈 없이 경기를 뛰어야 하는 날이기에 전쟁같이 힘든 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작가는 빈번한 좌절과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이번 전시명을 떠올렸다.
한편, 잦은 이동의 과정은 작가에게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이는 작가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쳐, 물건을 고를 때 그리고 작업을 할 때 가볍고, 저렴하고, 다루기 쉽고, 비교적 작고, 나중에 파기하기 쉬운 것을 찾도록 만들었다. 작가는 기후 위기나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위해 환경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모순적인 지점을 거울 보듯 바라보며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고민이 종이 더미 사이 유머러스하게 드러난다.
이사를 하는 경험에서 작가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자주 가볍게 자주 떠오르고 부서졌다. 그때마다 작가는 서울역의 노숙자에게 예전보다 더 눈길이 가고, 그들의 속사정이나 어린 시절 얼굴을 상상해 보곤 했다. 전시장 안에 종이 인간들 맞은편 목판 작업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2023) 속 등장하는 비둘기와 비둘기 인간, 박쥐, 노숙자들은 박스라는 오브제에서 떠오른 표상의 일부이다. 공간에 펼쳐진 종이 더미 작업은 종이가 구겨지거나 찢었을 때 생겨나는 물성의 비정형성을 과장해서 만든 것들이다. 이들은 생생하기도 하고 뒤틀려 고통받고, 환호하기도 한다. 작가에 의해 오리고/긁고/파내고/구기고/찢어서 만들어 낸 이 더미 작업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자 흔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끝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작가의 스트레스에서 파생된 상상의 결과물을 통해 유한하지만 선물 같은 하루의 소중함, 그리고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살펴보길 바란다.
#작가소개
배윤환은 서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가천대학교에서 회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관심사는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환경적 이슈에 대한 회화적 발현이다. 이는 전 지구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주로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화려한 색채로 시종일관 위트와 생동감 있게 묘사된 화면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그 주제의 심각성에 맞서 보편적인 회화적 순수성이 경감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작가노트
박싱 데이
그림을 오래 그리다 보면 붓의 움직임, 중첩, 묘사, 관찰, 자료 모음 등 회화 작업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내 기준에서의 ‘딴짓’이 시작된다.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조각, 목판, 영상 작업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과정도 꽤 반복되어 왔기에, 나에게 딴짓이라기보다 중요한 시퀀스가 되고 있다. 이번 전시 《박싱 데이(Boxing Day)》도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며 최근 작업실과 집 이사를 하며 느낀 문제점이 뜬금없이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와 방법 그 자체가 되었다. 많은 이사 탓인지 무언가를 제작할 때 내용과 주제보다 그 이후를 먼저 생각하게 되곤 한다. 비교적 가볍거나 작고, 저렴하며 빠르고 처리하기 좋은 것들을 먼저 떠올린다. ‘파기’를 염두에 두게 되는 것이다. 이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 다음 이동을 위해 언제나 작업실에 대기 중인 ‘이사 박스들’이었다. 사실 이사에 대한 고민에서 박스라는 소재가 떠오른 것인지, 박스를 먼저 떠올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오랜만에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어리석게 엉망진창, 맹목적으로 살아가다 자신의 몸이 변형되거나 이상한 몰골이 되어가는 인간들, 그와 관련된 사물을 만들고 싶었다. 잘 구겨지며,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흔들리면서, 쉽게 찢어지는 종이의 특성에서 괴이한 형태를 떠올렸다. 전시를 위한 작업을 하는 중에 이사와 관련한 계약을 진행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계약금 일부를 잃을 뻔한 일을 겪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내는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만나면서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에 비해 실재 삶 속에서는 이에 반하는 나의 여러 행동이 그 모습과 중첩되었고, 세기말적인 재난영화 속 인간의 군상이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개인사에 있어 커다란 프로젝트인 집과 작업실 이사는 내가 작업실에 오게 되는 횟수나 시간에 커다란 제약을 주었는데, 그 와중에 아직 풀지 못한 짐들 사이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뒤적거리거나 무거운 박스들을 들었다 놨다, 풀고 닫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행위가 계속될수록 박스 바깥에 기록한 것과 내용물이 일치하지 않았고, 물건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시간 속에서 같은 물건을 중복해서 사며 스스로 화를 내기도 하고, 마침내 찾아냈을 때는 환호했다. 작업실에서는 마치 유럽에서 서로 나누고 베풀며 사랑을 전했던 뜻밖의 선물 같은 하루 ‘박싱 데이’가 펼쳐지거나,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들에게 가장 힘든 전쟁 같은 날인 ‘박싱 데이’가 찾아오기도 했다. 상투적일 수도 있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자주 가볍게 떠오르고 부서졌다. 그때마다 집 근처 서울역의 노숙자들에게 예전보다 더 눈길이 가고 그들의 어린 시절 얼굴이나 저마다의 속사정을 상상해 보곤 했다. 나는 그들이 거처를 대신하여 만든 박스 꾸러미와 그 바깥에 써 놓은 문구들이 잘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눅눅해진 박스 날개의 칸막이는 서울역 앞을 바쁘게 오가는 안전하고 말끔한 모습의 사람들과 길 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위태롭게 나눠 놓는 것 같았다. 마치 언제든 그 길 위에 갑자기 합류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장면은 어지러운 게임 속 던전(게임의 몬스터가 모여있는 소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나의 연쇄적인 상상과 망상들은 종이 더미 작업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목판 작업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2023)는 박스라는 오브제에서 떠오른 표상을 목판을 파 내려간 아주 느린 드로잉이다. 작품 속 등장하는 비둘기와 비둘기 인간, 박쥐, 노숙자의 이미지는 내면에서 포착한 표상의 일부이다. 노숙자들을 보면 비닐이나 박스를 이용해 거처를 수시로 이동시킨다. 또 외부 환경에 취약한 박스와 같이 외관상 삶의 모든 것, 마치 내부의 신체 장기가 외부로 노출되어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뒤틀리고 접혀, 주름진 박스와 비닐, 피부를 보면 이상하게 백지 위에 검은 선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비둘기, 폭염 속 노숙자 옆을 지나가는 비둘기는 이런 생각을 할 때 같이 연동되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렇게 무리와 집단, 게임에서 이탈된 그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인간들에게 경고하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지구를 파괴하는 소행성의 경고를 끊임없이 무시하고 희화화하는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2021)이 떠올랐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느닷없이 오는 불운과 행운 그리고 그 안에 믿음과 불신 삶과 죽음, 개인과 집단. 그러나 알고 보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결과임을 알게 하는 착각 속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의도치 않은 사물이나 인물이 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며, 제작 도중 또는 나중에 ’이게 나였구나’라고 알아챌 때가 있다. 만드는 행위는 이런 생각을 자주 그리고 확실하게 만든다. 오브제를 쌓아 올리는 동안에는 만들고 있는 작업이 나와 거울처럼 마주 보고 서있기 때문일 수도 그림을 그릴 때처럼 외곽이나 주변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몇 년간 그렇게 만들어 온 환경 이슈라는 주제는 사실 나에게 ‘소재’ 자체였으며, 사실 그것에 반하는 나의 모순을 거울처럼 바라보는 일이 작업의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역행을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강력한 작업의 동기부여가 된다. 오리고, 긁고, 파내고, 구기고, 찢어서 만들어 낸 이 더미들은 내 이야기이자 흔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쌩쌩’하기도 하고 뒤틀려 고통받고, 환호하기도 한다. 끝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나의 스트레스에서 파생된 상상의 결과물을 통해 유한하지만 선물 같은 하루의 소중함, 그리고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