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트플랫폼

KR EN

EXHIBITION

전시
INCHEON ART PLATFORM

전체 전시

전시 레지던시 전시

2024 인천아트플랫폼 발표공간 지원 5. 희박 《썩지 않는 금은 없다》

2025-02-01(Sat) ~ 2025-02-14(Fri) 희박 개인전
공유하기
  • 네이버로 공유
  • 페이스북으로 공유
  • 카카오톡으로 공유
  • 링크 복사
전시 소개





2024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청년예술가 스튜디오 지원사업입주작가전

인천아트플랫폼은 <2024 인천 청년예술가 스튜디오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입주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발표공간 지원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전시정보

전 시 명 《썩지 않는 금은 없다 There is no gold that does not decay

작 가 명 희박 @heevaak

전시장소 인천아트플랫폼 프로젝트 스페이스 1(G1)

전시기간 : 2025.2.1.()-2025.2.14.(금)

관람시간 -일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썩지 않는 금은 없다: 성상과 우상 사이

 

이진실(미술평론)

 

희박은 가족과 유년 시절이라는 개인의 서사로부터 출발해 한국의 종교적 이콘과 범신론적 문화를 내밀하고도 문제의식에 가득 찬 시선으로 다뤄왔다. 이 시선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모계 중심의 가족이 품어온 소망과 대타자로서의 종교적 가치가 침전되어 있다. 어린 시절, 작가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작가 자신의 오롯한 꿈이라기보다 자녀들을 성직자로 키워내고 싶은 할머니의 바람을 대리 승계한 일종의 팔루스(phallus)’이자 내투사(introjection)’였다. “할머니의 염원처럼 수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고, “가족의 기대에 부응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1) 그녀는 이러한 과거 자신의 모습 속에서 무목적성과 습관화된 복종을 발견한다. 그래서 희박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성상(聖像)과 종교적 도상은, 말하자면 중층 결정화된(multi-layered) 침전물들로서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아주 기묘한 톤을 자아낸다.

2013년부터 제작된 <오늘도 무사히> 시리즈에는 기도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그림이 한국식으로 키치화 된 소녀상이 빛의 삼원색 아래 콜라주 되어 있고(<기도하는 세계>(2013)), 70년대 이후 한국의 기독교 가정이나 승용차, 택시 등에서 어김없이 볼 수 있던 복제의 매트릭스를 가시화하듯 무한 반복의 패턴으로 증식한다(<오늘도 무사히>(2019)). 첫 영성체를 받은 어린 날의 자화상은 <1996>(2009, 2023)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그려졌다. 이러한 반복은 회화적 기법의 성장이나 기조 변화보다는 두 번째에야 비로소 의미화된다는 외상적 장면을 연상케 한다. 특히 소녀 뒤에 우뚝 선 환영적인 성모상은 두 번째 그림에서 입체적이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희박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기독교적 도상들은 굉장히 의뭉스러운 면이 있는데, 허호정이 지적한 것처럼, 이는 모독에 가까운 성상 파괴적 시도들과 구별될 뿐 아니라, “성상을 레디메이드로 소비하는 팝-아트적 시도들과도 구별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희박의 작업에서 종교적 도상은 성스러움보다는 키치함을 드러내고, 경건한 태도보다는 강박적 응시를 드러내면서 문화적 기호이자 심리적 증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희박의 종교적 도상들에 관해 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도상들은 애증 섞인 자신의 과거에서 길어온 것이고, 그것과 마주하는 일도 화해하는 일도, 어쩌면 경멸하는 일도 완수하지 못한 어떤 상태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성상이나 종교적인 삶, 혹은 소망과 기복의 태도를 일련의 현상이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객관화하거나)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때문에 이 도상들이 그녀에게는 어떤 기호나 대상이라기보다 그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그 무엇, 난감하지만 소중한 것처럼 보이고 떼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거울로 나를 비춰야만 비로소 간신히 볼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인다. 작업 안에서 이를 비추는 과정은 기억의 투사, 고백, 혹은 성급한 회피나 열망으로 번져버린다.

회화를 중점적으로 내건 이번 개인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러한 심리적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평면, 영상, 입체, 설치 등으로 변주해온 가족의 이야기와 종교적 경험이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덜 서사적이면서도 더 강렬한 기억 이미지로 재생된다. 일단 전시장에서 들어서면 100호 캔버스를 위아래로 붙인 커다란 성모상 그림 세 점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성물 가게 앞을 지나가던 작가는 비닐로 포장된 성모상에 홀리듯 이끌려 들어가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Butter>, <Prussian>, <Pink to Purple>(2025) 이 세 점의 작품은 그때 비닐에 쌓여 있던 바뇌의 성모상을 재구성해 그린 것이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는 모습, 혹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한 손을 내미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그림 속에서 비닐의 주름으로 인해 불투명한 윤곽으로 등장한다. 가장 대중적인 가톨릭의 성물로서 바뇌의 성모상이나 루르드의 성모상은 소녀를 치유의 샘으로 이끈 일화에서 탄생했고, 성수병 패키지에 새겨지거나 밀랍 양초로 만들어지고, 집안에 모시기 위한 순백의(또는 채색된) 미니어처로 제작되곤 한다.

또한 성모상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닌 모계적 혈통의 휘하에서 성장한 작가의 개인사에 있어서 오랜 경험과 기억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모상이자 대타자의 형상이다. 가부장적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할머니의 정성, 기원, 영향력이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그녀에게 성모상은 가장 찬란하면서도 무거운 도상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볼품없이 비닐로 싸매진 성모상에서 납품될 처지에 놓인 가련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신성의 위치를 보았을지도, 아니면 그 투명한 싸개를 뚫고 응시를 불러들이는 강렬한 이콘의 힘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둘로 분할된 성모상 그림들은 자연광 아래 투명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색조로 다시 조각조각 분할되어 있다. 마치 다채로운 빛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들을 다시 붙여놓은 듯도 하고, 얼음에 갇힌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발아래에 번져나가는 색의 형상과 변조다. 중세 성화에서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발아래 자리한 색의 마블은 성육신이나 변용을 의미하곤 했다. 설령 그러한 도상학적 전통을 의식하지는 않았더라도 이 성모상 그림들에는 다소 진지하면서도 분열적인 묘사와 더불어 종교에 대한 다분히 양가적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말하자면, <오늘도 무사히>에서 두드러졌던 키치화된 이콘에 대한 문화적 성찰이나 유희와 같은 외적 반영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심상의 투사에 가까운 열띤 내적 반영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최근 작가가 그린 그림들은 작가의 아주 초기작 <1996>을 재방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1989>(2025)는 작가의 여동생이 아기였을 때 찍은 사진을 그린 것인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기를 위에서 찍어 또렷한 십자가의 형상을 드러낸다. 영성체를 받고 미사포를 쓴 언니, 두 팔로 십자가를 그리는 동생, 자매의 모습은 할머니의 제단과 그 열망이 고스란히 투사되고 박제된 이미지들이다. 소위 각성의 시간, 성인의 시간을 보낸 후 억압으로, 또는 결핍으로 재인될 만한 과거의 이미지를 화폭에 다시 떠내는 일이 어떤 것일지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이 반복의 행위가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새롭게 마주하고 의미를 경신하는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제작된 회화 작업을 관통하는 또 다른 모티프는 양초다. 행복한 파티를 연출한 아이돌 홍보 이미지를 일부 본떠 그린 <축하 케이크>(2025)<불과 소년들>(2025)은 성상이 지닌 푸르스름함과는 다른 온도의 빛을, 마치 결핍을 보충하는 온화한 에너지처럼 한 조각 훔쳐 온다. 그러나 이 또한 우상(idol)’이 지닌 덧없는 환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리아>(2025)는 성모마리아상을 작가가 초로 본뜨는 과정에서 남겨진 이미지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지난해 작가는 한동안 성당에서 쓰고 남은 대림초와 생일 초를 모아 돌탑처럼 쌓거나(<비는 마음>(2024)) 다시 녹여 성상의 부분 신체들로 떠내기도 했다. 기원의 도구이면서 어떤 형상으로도 재탄생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도 복제 가능한 밀랍의 변신은 영원함과 덧없음 둘 다를 모두 환기한다.

작가는 지난 몇 해 동안 작업을 이어오면서 확실하지도 않은 무엇을 향해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이 말은 꽤 슬프게 들리고, 불확실성과 결핍이 그녀의 삶과 작업에 있어서 얼마나 굴레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만큼 뭔가 확실한 미래를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지를 누설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소망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작업에서 성상이나 종교적 경험을 과거의 것으로 물릴 수 없게 만드는 동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결핍과 비참함을 마주할 때 진심 어린 기도를 하게 되니까 말이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의 비참함을 응시하는 만큼 신을 응시하게 된다.”2) 어쩌면 희박의 성물들은 앞으로도 용서와 복수, 사랑과 원망, 애도와 투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될지 모른다.


1) 희박의 작가노트, <희박한 소망, 희석된 믿음>, 2024.

2)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164.

 

 원고는 2024 인천아트플랫폼 예술창작공간 <인천 청년예술가 스튜디오 지원사업> 비평 프로그램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로 원작자 사용 동의를 받았습니다.


작가소개

희박(b.1987)은 대를 이어 물려받은 믿음에서 비롯된 인간 소망을 추적하는 것을 작업의 화두로 삼는다. 유년 시절에 보고 자란 '기도하는 소녀' 이미지를 '안위의 아이콘'으로 명명하고, 스텐실 기법으로 반복해 찍어내거나 스킬자수로 꿰매는 수행적 노동 방식을 통해 소망의 계보를 잇는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전쟁 속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작가의 외조모 옥순의 구술이 담긴 단편 다큐멘터리 <옥순의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개인적 서사에서 촉발된 작업은 한국의 범신론적 기복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믿음과 소망의 실체화를 시도한다. 인천 출신의 외조모 옥순이 인천 답동 성당에 발을 디딘 것처럼 외래 종교가 한국에 상륙해 토착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유교문화와 기복 신앙, 일상적 미신이 뒤섞여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하며 자라왔다. 이처럼 한국적 정서가 스며들어 변형된 사례를 수집하고 그 안에서 은유적 표현과 상징을 추출해 작업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