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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큐레이터 양성 및 지원프로그램 <이제 막 큐레이터>

2020-06-20(Sat) ~ 2020-06-20(Sat) 이제 막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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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사 소개


빛나는 발굴을 위해서 오늘 우리는 무한히 풍부한 광맥을 짚는다 1)


이근정(2020.06.20)


6월 20일 토요일. 인천아트플랫폼이 주최하는 <이제 막 큐레이터>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날이다. 오전 1교시에 이어 오후 2교시의 막이 올랐다. 수업 제목은 <한국현대미술의 다원-다층의 역사: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임근준 미술비평가가 강의한다. 강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강단에 섰다. 임근준 비평가의 명성은 널리 들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다.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예리한 눈빛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에 두른 하얀 면수건은 그가 땀이 날 만큼 열띤 강의를 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1차시 제목은 <6.25 전후 세대 미술가의 모더니즘과 자의식: 4.19 혁명을 정점으로 삼았던 한국 앵포르멜 회화 운동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다. 강사가 연구를 지속하며 업데이트 중인 ‘미완의 연표’가 미술계의 사건들을 촘촘히 담은 채 제시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 조선미술협회(→대한미술협회), 조선미술동맹이 잇달아 결성된다. 피식민의 굴레를 벗어야 하는 과제와 격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야 했던 미술가들의 숨가쁜 시대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면서 조선미술동맹의 좌익 예술가는 대거 월북한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이승만은 독재 체제를 강화한다. 1955년에는 대한미술협회에서 이탈한 서울대 출신 작가들이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집단 거부한다. 국전은 홍대파인 대한미술협회가 주도했는데 심사위원 선정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같은 해 ‘반(反)국전 선언’으로 박서보를 위시한 청년 미술가들의 기성 화단 저항운동이 나타난다. 강사는 1957년을 전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 해에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선구로 꼽히는 다섯 그룹이 나타났다. 다섯 그룹은 모두 국전에 등을 돌리고 자체 전시를 발표했다. 이중 <현대미술가협회>전은 20대 후반 청년 미술가들이 결집해 추상표현주의나 앙포르멜 같은 과격한 제스처를 드러낸 전시였다. 이듬해 3회 전시가 열릴 무렵에는 평론가 방근택이 방향 제시에 힘을 보탰다. 그리하여 4회 전시 때는 출품작의 화면이 400~500호로 대형화하고 ‘앙포르멜’이 중심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국전에 대항하는 재야의 움직임이 생기면서 현대미술운동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로서 1957년 앙포르멜 운동이 기치를 올렸다.


임근준 강사는 한국 미술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적시하는 틈틈이 같은 시기 북한에서 일어난 상황과 이응노, 김환기, 이우환 등 외국에 건너간 작가들의 현황을 꼼꼼히 짚었다. 이응노와 김환기가 나아간 작업의 지점들이 국내외 정세와 함께 이해되었다.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한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4회 <현대작가초대전>이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시위와 진압경찰의 발포음이 전시장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예술실천은 정치적ㆍ사회적 현실과 함께 간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1960년 10월 방근택이 현대미술가연합 결성을 주도하는데, 1961년 박정희가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방근택은 제5회 <현대미술가협회>전에서 ‘제1선언’을, 그리고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의 연립전에서 ‘제2선언’을 발표한다. 임근준 강사는 이 선언의 내용을 연표에 실었고, 수강자인 나는 그 문장들의 울림을 생생히 느꼈다.


4.19 혁명기에 정점에 올랐던 앙포르멜 운동의 열기는 급격히 식는다. 박서보가 <세계 청년화가 파리 대회 합동전>에서 대상을 받고 귀국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앙포르멜은 포화 상태”라고 비판한 것이 한 계기였다. 현대미술가협회가 해체되고 악튀엘이 결성되었으나,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전개된 억압적 분위기와 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억누르는 비상계엄 시국에서 앙포르멜은 더욱 위축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국의 신문물은 국내로 대거 유입된다. 1966년에 이르면 앙포르멜의 경향이 기울고 실험미술이 나타난다.


오늘 강의의 결론을 수강자의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국에서도 전후 미국의 추상미술과 같은 움직임이 일었다. 1960년대 앙포르멜과 1970년대 단색화 운동이 그것이다. 앙포르멜과 단색화의 관계는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다. 단색화를 이해하려면 그전에 일어난 앙포르멜을 먼저 조명해야 한다. 살펴보았듯이, 1950년대 후반 나타난 앙포르멜은 이승만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에너지가 “지글지글 끓”고 “철철 녹”으며 나온 표출이었다.(인용부호 안은 방근택의 제2선언 중)


강사가 나누어준 리포트에는 ‘한국/현대/미술의 다원적/다층적 역사’라고 제목에 빗금 부호가 표시되어 있다. 빗금은 보통 대비되는 어구를 묶어 나타날 때 사용하는데, 강의를 듣고 보니 여기서는 서로 비추며 그리고 떼어놓으며 접근하자는 뜻으로 다가온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임근준 비평가의 언어는 춤추듯이 활기를 띠었고 그 문제의식이 ‘다층적으로’ 다가왔다. 강의 내용이 묵직하니만큼 강의용 리포트가 미리 제공된다면 예습에 도움이 될 것이다.


1)방근택이 1961년 제5회 <현대미술가협회>전에서 발표한 “제1선언” 중



이근정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공부한 것이 한계가 있어 미술을 문학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사진이 일종의 픽션이라고 생각하는 사진가의 꾐에 넘어가 올해부터 복합문화공간을 함께 운영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10분 거리, 일상과 사건이 넘나들고 문화와 소비가 뒤섞이며 노동과 유흥이 교차하는 그 동네에서 무얼 보여줄지 걱정이 많다. 벅차면서도 아찔하게 <이제 막 큐레이터>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