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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큐레이터 양성 및 지원프로그램 <이제 막 큐레이터>

2020-07-11(Sat) ~ 2020-07-11(Sat) 이제 막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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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사 소개


민족, 한국의 정신성은 또 다른 정신성의 도래로

도듀이(2020.07.11)


인천아트플랫폼 <이제 막 큐레이터> 프로그램 속 한국현대미술사 강의로 총 8강으로 구성되어 진행하고 있다. 7월 11일에 진행되었던 4번째 강의는 민중미술의 연대순을 살펴보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전 3강에서 민중미술의 초창기 발생한 정체불명의 자의식이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보았다면, 이번 강의에선 거기서 좀 더 발전된 자의식(강의록에 명시되어있는 한국인의 정신성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에 대해 집중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러한 자의식이 민중미술의 기승전결의 흐름을 통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향 속에서 찾고자 한 한국인의 정신성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가에까지 이르기까지 민중미술을 통한 전범위적 근현대 및 동시대 미술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 새로운 방향의 여명기1 : 1960년대

민중미술은 간략히 설명하자면 전통을 ‘계급’으로 나눔으로써 노동계급 속에서 새로운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의 시발점은 1965년 임영방의 한국으로 귀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그는 강의를 통해 모더니즘과 사회 비판적인 미술을 소개하며 민중 미술의 큰 밑그림을 그렸으며, 동시에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전 <제 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일제 강점기 선전의 영향을 받음은 물론 왜색성 논란으로 인해 현실 동인의 결성(당시 제1선언문 발표를 통해 민족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이 선언문은 김윤수가 감수 역할을 했는데 그는 민중미술의 방향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을 촉발 초래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아직 구체화가 되지 않은 형태로 그치기에 이른다. 민중미술의 첫 번째 출발인 1960년 중후반에는 이렇게 아이디어로 그치게 되어버린다.


- 또 다시 해는 떠오른다, 여명기2 : 1970-80년대 전반

60년대 아디이어로만 허무하게 끝나버린 민중미술은 또 다른 여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6년에 미술계에 새 흐름 대두되면서 77년에는 <뿌리깊은나무>창간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발행가이자 큐레이터 및 비평가였던 한창기는 전통주의자로 민중의 생활용풍 속의 아름다움을 추구함과 동시에 한국을 혁신하고자 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었던 이응노도 민중미술 등장에 있어 이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정신적인 자양분 제공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토대에서 1978년 <제1회 동아미술제>에서 한국 특유의 비평용어인 ‘새로운 형상성(추상, 구상도 아님을 여기선 의미함)’을 내세우면서 이전 시기 앵포르멜, 단색화에서 추구한 추상에서 벗어나 구상미술을 부활시킴(극사실주의 또한 대두됨)과 동시에 구체적인 민중미술의 발판과 거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1970년대에는 본격적인 민중미술의 자양분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후 등장할 작가들에게 정신적인 자양분을 주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81년 서울미술관(신형상 미술과 민중미술에 중요역할), 동덕미술관(특히 박용숙관장의 민족적 리얼리즘 논문, 그는 소셜리얼리즘을 추구했다.)이 뒤이어 중요역할을 하게 되었고 특히, 1982년에는 민중미술 관련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렁(김봉준, 이기연, 장진영, 김준호, 성효숙으로 구성)이 결성되며 마당극형태의 정치 풍자극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행사의 총체적 역할ㄹ서 민중미술을 바라봐야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김봉준 그리고 오윤은 민중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면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민중미술을 구현하기에 이르게 된다.

강의 제목처럼 민중미술은 1969년, 1979년에 이중출발이라는 독특한 시작점은 ‘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정신성의 태동을 가능케 했다. 아직은 신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의 시점이지만, 앞으로의 미술운동의 불꽃을 지피게 해 준 그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 구체화의 승기 = 한국인 정신성 갱신에 접근

1984년에 이르러 민중미술이 미술계에서 승기를 잡게 된다. 이전까지 신형상과 민중미술이 평행선을 타고 있었다면, 민중미술이 흡수통일을 함으로써 이 둘의 연계성 또한 발생되게 된다. 그리고 1년 후인 85년, 민중미술의 1차적 완전함을 이룩하였다. 이는 이론 및 작업적으로 완성을 의미한다.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의 개최는 민중미술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86년, 민중미술의 기준점이 세워직 된다. 특히 여기엔 그림마당 민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민 갤러리는 당시 민중미술 전담 갤러리로 오윤 등 많은 작가들이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당해 가장 큰 사건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중민중미술전>으로 이는 한국민중미술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 양면성 : 승리의 또 다른 승리와 쇠퇴

86년의 국제적인 주목에 한국 민중미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면, 87년은 사회변혁을 이끄는 또다른 승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정체기를 겪으며 방향성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특히, 89년 정신적 지주격인 이응노의 급서가 정체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민중민족미술의 진영이 사분오열되기도 했다. 이전까지 새로운 모색을 위해 쌓아온 돌들을 하나하나 놓아버리게 되는 시점이 다가오게 된 것이다. 1990년 민중미술은 10주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결산이 시작되었다. 어찌보면 성급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세계의 흐름 또한 민중미술의 위기를 야기시킨 요소로 볼 수 있다. 90년 중국의 천안문사태 발발, 91년 소비에트의 붕괴 등의 이념체제에 큰 변혁들은 민중미술의 동기를 상실시키기에 이른다.

91년부터 해당 활동의 예술적 성과는 0였으며, 92년에는 퇴행과 상업화의 반복된 경향을 보임과 동시에 동시대성에 맞는 새로운 담론으로써 93년에 포스트민중미술의 가능성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4년 본격적인 민중미술의 결산에 이르렀고, 이듬해부터 동시대성에 기반 한 또 다른 새로운 미술을 전개함으로써 여러 시도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공간 또한 마련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민중미술 시대 속에서 아웃사이더, 즉 비주류에 몸담고 있었던 최정화와 이불작가가 주류로 들어오게 되었다.

민중미술은 추상에서 구상으로의 부활을 일으켰으며, 민중 속에서 한국미를 찾으려고 했던 근현대미술운동이었다. 기승전결 흐름을 통해 민중미술은 다소 성급하게 마무리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 리얼리즘, 소셜 리얼리즘을 추구한 운동인 만큼 사회주의의 영향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활동이 전개된 시기, 전 세계적으로 이념체제의 붕괴현상의 발생은 민족, 민중 속 리얼리즘의 방향성의 지속성에 대한 의문들이 발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미술은 형상미술 흡수 및 시작됨으로써 이전까지 배제되었던 이미지, 즉 구상으로의 회귀 그리고 전후 추상미술을 보완한 모더니티 추구에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미술을 통해 예술가들은 한국인의 정신성 갱신을 ‘사회운동’처럼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싶다. 그래서 이전 추상미술에서 거부했던 정치적 활동과 예술 활동을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운동을 만들어나감은 물론 그 속에서 민중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해나갔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공공미술, 사회성을 지닌 미술과도 그 연관성이 다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계급, 노동의 맥락은 아니지만, 같이 해 나감, 참여함의 맥락에서는 가능성이 일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은 앵포르멜, 단색화와는 또 다른 한국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지 등의 재료적인 측면의 한국성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 요소, 정치 및 사회 등 한국성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모든 분야의 예술에 있어 한국성을 부활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처럼 옛 것을 통해 또 다른 한국성이 발현되고 제 2차 한국인의 정신성 갱신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도듀이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동양화의 재료나 기법에만 그 틀을 유지하는 것은 원치 않아 설치, 입체 등 여러 분야의 예술 형태로 자신만의 언어를 탐구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다. 작업은 초기 욕망적 존재로서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를 진행했다면, 욕망 및 욕구적 성향에 대해 생각을 발전해 나가던 중 여성 특히 ‘모성’ 또한 이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들이 있음을 발견해, 이에 대한 일련의 작업들을 통한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