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5(Sat) ~ 2020-09-05(Sat)
C 공연장
민예은의 NICHE - “오, 즐거운 나의 집! (Home, Sweet Home!)”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1823),
John Howard Payne 작사, Sir Henry Rowley Bishop 작곡, 김재인 번안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은 헨리 비숍 경(Sir Henry Rowley Bishop)이 작곡한 곡조를,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이 1823년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Maid of Milan)》에 극음악으로 차용한 노래다. 후에 알렉상드르 길망(Alexandre Guilmant)의 《오르간을 위한 환상곡 43번(Fantasy for organ Op. 43)》에 쓰이기도 하였다. 1857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ond Thalberg)가 〈즐거운 나의 집〉을 주제로 삼아 피아노를 위한 일련의 변주곡들을 쓰기도 하였으며 한국에서는 김재인이 번안하였다. 이렇듯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은 한국어로 번안되기까지 여러 국가, 인종, 지역, 장르, 매체를 거쳐왔다. <즐거운 나의 집>의 여정은 노마드(Nomad)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민예은은 ‘집’이라는 매개로 이러한 노마드의 지점을 포착한다.
민예은은 물리적 장소, 심리적 (비)장소, 그리고 가상의 장소에까지 존재하는 ‘집’의 여러 양상을 변주하며 이것이 향하는 바를 추적하며 탐험해 나아간다. 그의 ‘집’ 중에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2019), <House(es)>(2017) 와 <A sleeping room>(2013), 그리고 <Breathing Space>(2016)를 살펴보며 ‘집’을 매개로 한 정주(定住)와 정처(定處)의 향방을 들여다보았다.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2019)를 보면 먼저 작품명에 궁금증이 생긴다. 이 제목은 작가가 물건을 수집하면서 거래한 중고 사이트 판매자의 닉네임의 모음이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인 사물은 시골의 마을회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달력,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간직한 괘종시계 등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각기 다른 시간 축과 공간 축을 담지 하는 사물들은 전시장에서 한데 모이고 공통의 시·공간을 점유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축은 뒤틀리고 하나의 수평의 시·공간 축으로 재맥락화된다. 그리고 이들은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나며 이전의 이야기에 관객의 경험이 덧입혀져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받으며 사물의 역사성 또한 재맥락화 된다.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2019)는 본래 직육면체로 구상한 큐브를 비정형의 조각으로 나누어 잘라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입체-조각보들은 시선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며 포착된 이미지들은 공간을 자른 단면처럼 고정되어 보이기도 한다. 닫혀있는 직육면체 큐브는 조각으로 나누어지면서 끝과 시작점이 사라지고 그 영역은 무한으로 팽창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상상의 공간을 점유한다. 지하 1층을 가득 채우는 흩어진 직육면체는 일종의 ‘입체-조각보’이자 ‘관계-복합체’로 기능하는 것이다.
민예은,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 혼합매체, 가변크기, 2019
<House(es)>(2017)에서 민예은은 ‘집’이 단수일수도, 복수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제시된 ‘House(es)’는 출입문이 없으며 가벽에 의지하여 공간이 구획된다. 이에 따라 안과 밖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혼성(hybrid)’의 공간이 된다. 이 집은 하나이면서 둘이기도 한 모호한 경계를 띈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며 단수이기도 복수이기도 한 장소이며 비장소가 바로 ‘집(들)’인 것이다. 이러한 ‘집(들)’은 작가의 이전 작업인 ‘방(들)’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A sleeping room>(2013)은 익명의 다수에게 기증받은 사물들로 가득 채워진 방이다. 이들은 여성의 것일 수도, 남성의 것일 수도, 아이의 것일 수도, 노인의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성별과 나이, 인종과 지역을 뛰어넘은 ‘익명의 혼성’을 담보한다. ‘혼성’의 방(들)은 확장되어 집(들)이 되었고 이는 모호함에 대한 연작이다. 작가는 이러한 모호함에서 오는 부유를 사고의 혼성에 유비한 바 있다. 사고의 혼성이 <House(es)>와 <A sleeping room>에서 사물의 혼성으로 나타나며, 이들은 일종의 혼성 모방, 패스티쉬(pastiche)처럼 늘어선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덧대어져 하나의 시·공간에 모이고 관객의 경험이 합해지며 새로운 맥락 하에 재위치 된다. ‘익명의 혼성’은 단지 각각의 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합 자체가 지속적인 팽창을 내포하는 가능성이다.
(좌) 민예은, <House(es)>, 복합매체, 가변크기, 2017(우) 민예은, <A sleeping room>, 복합매체, 가변크기, 2013
<Breathing Space>(2016)은 (반)투명한 풍선들이 군집을 이룬다. 작가는 <Breathing Space>를 자신과의 사색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마음 정류장’으로 언급한 바 있다. ‘마음 정류장’의 안과 밖 ‘사이’에 있는 풍선을 이리저리 움직여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 순간은 일종의 ‘케렌시아(Querencia)’*로 작동한다. 특정한 순간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풍선은 혼자 있을 땐 투명하지만 그것이 군집을 이루면서 일견 불투명해진다. 그리고 풍선이 직조하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 이를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따라 그 모양은 변화한다. 마치 풍선이라는 재료의 속성처럼 줄어들고 팽창하며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는 등 가변적이며 유동적이다. <Breathing Space>는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기능하며 관객에 따라 매번 다른 순간을 생성하며 호흡한다. 화석화되고 고정된 것이 아닌 매 순간 주변의 환경과 호흡하며 변화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을 뜻한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위협을 피할 수 있는 경기장의 특정 장소를 머릿속에 표시해두고 그곳을 케렌시아로 삼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에서 소는 숨을 고르며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 에너지를 모은다.
민예은, <Breathing Space>, 풍선, 아크릴, 폴리카보네이트, 2016
이러한 그의 집(들)은 ‘Niche’의 ‘사이에’ 위치한다. ‘Niche’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하게 무엇을 점유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공간’이며 유의어로는 틈새(Hiatus), 적소(Proper Position), 망명의 장소(Place of exile), 홈(Groove) 등이 있다. 이 단어는 건축적 개념에서 유래하였는데 ‘서양 건축에서 장식을 목적으로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시설’이라는 뜻이다. 16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도시의 형성과 함께 ‘틈새 공간’이라는 건축물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도시와 함께 출현한 것이다. 이후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개념으로 확장되어 생태학에서도 쓰인다. 저매인과 기터맨(Germain&Gitterman)은 생태 체계적 관점에서 인간이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가 활동하는 공간을 생태적 생육지(habitat)와 생태적 지위/활동공간으로(niche) 나눈 바 있다. 생육지(habitat)는 생태학적 의미로 유기체들이 발견되는 장소를 의미하고, 생태적 지위/활동공간(niche)은 유기체 중 한 종(種)이 공생적 영역 안에서 점유하는 지위를 의미하며 일종의 심리적 (비)공간을 일컫는다. 도시에서 현대인은 끊임없는 ‘틈새(Niche)’ 속에서 부유하며 물리적 공간, 심리적 (비)공간, 가상(Virtual Digital)의 공간에서 노마드로 살아간다. 노마드의 삶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혼재하는 문화권 안에서 현대인은 필연적으로 심리적 노마드의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노마드의 상태를 디지털 환경이 증폭시키기도 한다. 노마드는 비단 물리적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상태’인 것이다. 민예은은 이러한 노마드 상태의 ‘Niche’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을 ‘집’이라는 매개로 포착하였다. <Breathing Space>는 정주(定住)할 곳이 없는 자들이 잠시 정처(定處)하는 시점을 마디마다 포획하였고, <House(es)>와 <A sleeping room>은 노마드의 혼성성을 ‘집’이라는 형태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그리고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은 물리적인 ‘집’의 형태를 벗어나 좀 더 입체적이고 확장적이며 상상의 영역, 가상의 공간에 위치하는 개념적 (비)공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비)공간은 시·공간 축을 수평의 질서로 재편하며 번짐과 엉킴의 방법으로 끊임없이 팽창한다.⠀
그의 ‘집(House, Haus, Maison, Casa, 家….)’은 모순, 무질서, 부조화, 불편함, 이질성 하에서 흐려지고, 뒤엉키고, 연결되며 ‘틈새(Niche)’에서 생성과 소멸을 재맥락화하며, 부유하고, 팽창하는 끝없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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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현 | 예술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미술을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기인식된 사고를 전환하는 확장적 매개로 보고 이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탐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