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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사 소개

쏘아올린 아이러니, 카타르시스이자 하나의 신호탄으로 - <엷은 밤(2017-2018)> 작품을 중심으로

도듀이(2020. 10. 13.)

‘신체’를 빼고 고등어 작업을 논할 수 없다. 작가의 몸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식이장애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식이 장애의 증상 중 삼키고 토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로테스크를 선택 한 것처럼 보인다.(거식증과 폭식증의 파괴와 재생의 반복되는 행위) 더 나아가 작가는 사회 속 여성의 신체로 시선을 확장한다. 자신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로 인해 재단되고 평가되는 여성 신체(자신의 몸에 학대(성형수술, 다이어트 등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맞추는 행위))의 아이러니들을 작가는 목격했고, 이 또한 그로테스크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처럼 그녀가 초기 작업에서 그로테스크를 사용한 것은 여성의 억압과 수난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2017년을 기점으로 그녀의 작업에 변화가 생겼다. 2018년, 서울대미술관 《여성들의 일》전시에서 작가는 12점으로 구성된 <엷은 밤(2017-2018)>연작을 선보였다. 여성의 비중이 줄고, 남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강렬한 시각적 대비(빨강색과 파랑색)와 그로테스크가 아닌 모노톤의 깔끔함, 정돈됨, 차분함으로 바꿨다. 특히 남성 등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색다름을 느껴지게 하였다. 참여 작가 11명 중, 유일하게 남성을 그려낸 여성주의 작가로 비춰졌다. 본인 또한 해당 전시를 직접 관람했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왜 남성인 것일까’, ‘그렇다면, 왜 작업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의 두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고등어 작가는 ‘2017년에 작업의 방향이 변화했다’만을 언급할 뿐, 그에 대한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그래서 본인은 이 글을 통해 2017년 이후 작업 변화가 나타나게 된 연유와 이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성이 나오는 작업들을 정리해본 결과, 그 시작은 2016년부터 나타난다.(에로티시즘 작업의 남성은 제외했다. 여성의 불완전한 신체를 보완해주는 존재로써 남성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 중 두 가지 작업을 통해 <엷은 밤>작품의 남성의 등장과 그 상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작업은 <얼굴들(2016)>이다. 남성이 주가 된 첫 작업으로 캔버스에 담긴 얼굴들을 자세히 보면, 다소 어색하다. 목 까지만 표현함으로써 화면 속에서 마치 잘려진 신체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 그리고 대칭되지 않는 눈은 온전치 않아 어딘가 불안한 모습처럼 보여지고, 어두운 녹색 배경은 불안감을 더해준다. 이 작업은 작가가 길거리를 지나가며 마주한 남성들의 모습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성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함에서 오는 그들의 불안함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 피해 관련 사례들이 쏟아지는 지금 상황에서 남성의 불안함이라, 다소 아이러니하다. 그 실마리를 찾아 작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여성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함’에서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무엇이 그들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건 아마 ‘성적 욕구(욕망)’ 때문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 성만 다를 뿐 분명 동등한 존재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복해야 하는 대상, 구체적으로 성적 욕망의 충족대상으로서 여성(여성을 불완전한 대상이라고 보는 생각 또한 이에 포함된다.)을 바라본다. 머리로는 같은 인격체임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여성을 인식하고 바라보려는 행동에서 느끼는 혼란이 바로 그들의 불안함이 아닐까.

두 번째 작업은 <살갗의 사건(2017)> 드로잉 연작이다. 그 중 일부 연작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 속 등장인물이 ‘남성-석상-여자’에서 ‘남성-석상’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남자의 모습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석상을 메고 출발 준비를 하던 순간에 있던 남자는 이후 다른 장소들(고속 도로 위나 숲 속)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나체로 표현된 여성은 이전 작업에서 드러나는 에로티시즘 영향의 연장선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남녀 관계를 통한 신체 결합의 표현은 이전처럼 ‘직접적’이 아닌 ‘은유적’이다. 이는 나체의 여성이 석상을 만지며 바라보는 행위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여성-남성-석상의 동시 등장은 이전과 이후 나오게 될 작업의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상은 남성의 경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여성에 대한 소유를 확인하는 순간일 것이다. 반면 여성의 경우, 신체 관계를 통한 결합은 ‘또 다른 신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로, 현실의 ‘불완전한 몸’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완벽한 몸’을 경험하는 순간이자 성취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드로잉 속 여성이 석상을 만지는 행위는 남자의 신체성이 소멸되는 직전의 상황 혹은 남성이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충족하며 만족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직전’이라는 상황에 중점을 두고 본다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행동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엷은 밤>연작에서 좀 더 심화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엷은 밤> 작품들 중 표정 없는 남성은 자신과 닮은 석상을 메고 줄에 매달린 얼굴만 남은 석상(표정 존재함)을 쳐다본다. 또 다른 작품 속에서 그는 다른 공간과 장소로 이동하지만 마모된 석상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신체가 온전치 못한 석상들을 마주한다. 이전 작품이 석상을 맨 남자의 여정의 시작과 그 과정만을 조명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남자의 결말을 짐작케 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바로 남자의 이동(관계하지 못하는 남성이기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러 이동하는 것이다.)과 함께 계속해서 등장하는 부숴 지거나 신체 일부만 존재하는 조각상들로, 그들은 그가 언젠가 자신들처럼 소멸될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단어 ‘욕망’과 ‘소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혹은 이미지)와는 반대로, 작가는 깔끔하고 정돈된 톤, 선 그리고 형태들로 남성의 욕망과 신체 소멸을 보여준다. 보통 ‘소멸’이 격정적, 동적, 극적인 이미지와 표현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태도는 또 다른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하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깔끔함, 정돈됨, 차분함은 마치 대상이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신체성(남성성 혹은 그것에서 파생되는 우월감, 우위라고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남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로 판단된다. 이는 현재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모습과도 연결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시대 흐름 속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은 기존 사회 시스템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잘 유지해왔던 남성들에게 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후 남성들은 여성들이 무언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할 때마다 그들만의 방법과 방식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처럼 남성이 아직도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내보이려는 행위는 작품 속 남성의 모습(소멸 중이지만, 이동을 통해 자신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멸하지 않을 것임을 부정을 하고 있다.)과 연결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깔끔함, 정돈됨, 차분함은 지금의 남성들이 애쓰는 모습에 대한 작가의 냉소가 아닐까. 오랫동안 남성은 ‘불완전한 존재로써 여성’, ‘남성은 여성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여성들에게 인식시키며 억압과 폭력(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등)을 가했으며, 그 결과 여성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 남성들의 불안은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불안이자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의 냉소적 태도는 남성들이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 자신의 모습과 상황을 직시하기를 바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고등어의 작업은 갑자기 그리고 한 순간에 변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등장하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고, 작가는 또 다른 요소들을 추가해 또 다른 대상과 그 대상의 신체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 주관적인 경험에서 사회적, 정치적 성격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전시’ 행위는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 특히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였다. 작가는 신체를 통해 내러티브 확장하고 이를 공동의 장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지금 생각해보면 수동적으로 사회구조의 억압에 반응했던 것 같다. 지금같이 함께 이겨나갈 생각을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정한 '목소리'를 모을 창구가 부재했다.’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2017년 작업의 변화는 과거의 수동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진정한 목소리를 모을 창구를 보여주고자 하는 필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작품의 주인공인 남성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작가는 욕망(권력, 우위 등)을 놓지 않거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무의미하고 헛된 것임을 냉철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성이라는 대상과 반대로 조용함 혹은 차분함이 느껴지는 작품의 표현 기법은 작품 속에서 대비되어 공존한다. 이처럼 작가의 아이러니들은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며, 다른 여성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녀의 작품 속 아이러니는 대나무 숲에서만 머물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숲 밖으로 이끄는 신호탄이 아닐까. ‘남성’이라는 그늘에서 숨죽이며 살던 여성들이 자유(지위 상승, 불안감 해소, 완벽한 신체 획득 등이 해당)를 얻게 될 그 날을 위해, 고등어의 작품 속 신체는 계속해서 아이러니와 내러티브를 생산해내며 또 다른 신호탄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과연 그 신호탄들은 어떤 모습과 움직임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인가.


도듀이 | 동양화 전통 재료와 기법들을 설치, 입체 등과 결합시켜 자신만의 언어를 탐구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다. 초기 작업이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면, 현재 ‘모성’이 내포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