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1(Sat) ~ 2020-10-31(Sat)
C 공연장
무료
032)760-1017
고유섭의 구수한 큰맛 : 한국현대미술 가운데 여전히 유효한가?
김연지
우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이로써, 한국미술계에서 꾸준히 재조명되어온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가운데, ‘미’, ‘예술’, ‘미술’ 등 미술사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이전 ‘조선미술사’ 정립을 이루기 위해 조선미술의 미적 특질을 현상적 차원에서 규명하였다. 하지만 이인범의 「고유섭의 해석의 제 문제」(2005)와 김명숙의 「고유섭의 한국미학, 미술사학 제 해석」(2015)에서 논의되었듯이, 그가 전개한 미술사에 대한 평가는 제3기에 따라 상반된 평가들이 이루어져 왔다. 제1기는 고유섭이 타계한 이후, 이른바 제1세대 한국미술사학자들이 형성된 시기이다.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이경성 등은 고유섭의 작고로 미학, 미술사 전공자가 전무한 상황 가운데서1) 미술사에 뛰어들어 그의 유고들을 정리하고 단행본으로 편찬하였으며, 다른 한편 그가 남긴 학문적 과제들을 보다 구체화하였다. 제2기는 1970년대 이후로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에서 고유섭의 관점을 더욱 강조하는가 하면, 이와 대조적으로 고유섭의 미적 특질 규명이 일제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점을 한계로 내세운다.2) 제3기는 1980년대 중반으로 고유섭 전집이 발표됨과 동시에, 한국 근대미술사와 미학의 형성 전개 속에서 고유섭의 위상과 성격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유섭에 관한 다양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고유섭이 제시한 ‘구수한 큰맛’이나 ‘무기교의 기교’와 같은 미적 규정은 전지구적 시대인 현재의 시점에서 유효한가? 필자는 이러한 질문을 토대로 고유섭의 미적 특질 개념이 현재에도 유효한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우현 고유섭은 일제 강점기 가운데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그 당시 경성제대의 미학 수업은 동경제대 출신의 일본인 교수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향 하에 고유섭은 미에 대한 관념적 가치관을 형성하였다. 특히 그의 지도 교수였던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는 베를린 대학시절의 경험을 반영하여 미학, 미술사, 고고학을 예술학이라는 이름아래 묶어 미학미술사연구실을 공동으로 구성하였으며, 고유섭도 이 연구실에서 조수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고유섭의 학문형성과 미술사 정립의 주요 이론들이 피들러(Conrad Fiedler)와 칸트(Immanuel Kant), 뵐플린(Heinrich Wölfflin) 등에 천작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 받았던 스승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고유섭은 서양의 여러 이론가의 이론들을 대입하여 한국의 미적특질을 규명함으로써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미학 및 예술작품을 서화골동의 감상 차원에서 넘어서고자 하였다.
나의 문제의 중심은 뵐플린Wölfflin 일파가 제출한 근본개념과 리글Riegl 일파가 제출한 예술의욕과의 환골탈태적 통일원리와 (지배의 방법론은 평가의 기준이요 사관의 준칙은 아니다) 프리체Phlielze 일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이미 쿠라하라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기계론적 배합보다도 변증적 유기적 이과(理果)를 어떻게 통일시키고 적응시켜야 할까? 이러한 방법론적 고민에 있다 하겠다.3)
이처럼 고유섭은 양식적 방법론과 정신사적 방법론에 사회·경제사학을 가미하여 총제적인 관점에서 한국미술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미술작품과 문헌기록에 대한 고증적 연구를 통해 한국미술사를 체계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체계, 즉 인문과학의 관점에서 그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미술작품을 단순한 미의식의 재현 이상으로 보고, 미술을 통해 그것이 제작된 시대정신과 문화의식, 또는 사회, 정치, 경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읽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4) 예컨대 고유섭이 정의한 ‘구수한 큰 맛’은 조선미술의 특질이 생활 ― 즉 민예적인 것― (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형태가 완벽하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정제성과 균제성은 부족하지만 순박하고 순진하며 자연에 순응한다고 기술한다. 이처럼 고유섭의 ‘구수한 큰맛’은 가치 형식적 검토와 사실 내용적 검토들을 통합하여 한국미술의 미의식을 실증하고 있다. 이것은 미적 경험의 다양한 가능성의 본질 및 그 경험의 독특한 미술적 형성의 가능성을 한국미술의 가치적 성립근거와 관련되는 ‘보편적 가치기준’, 또는 ‘판단의 준칙’을 찾는 문제 지평을 설정함에 있다.5)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동시대의 한국현대미술의 미적 특질을 규명하는 데에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로써 미술작품이 단순히 미의 반영이 아닌 문화의 반영이라면, 동시대의 한국적 미의식은 수많은 다양성으로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전지구화라는 혼성적 상황 속에서 예술은 다양성과 새로운 형태의 출현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에, 우리는 과거 고유섭이 규정한 미적 특질을 넘어서야 한다. 이제 특정 과거에서 논의되었던 한국성은 더 이상 한국의 미적특질을 규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시대 미술작품의 형성은 다양한 기표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을 직조(tissu)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 경제, 정치들의 관계맺음을 통해 구축되는 바와 같이, 한국현대미술의 미적 특질 역시 다양한 관계 맺음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과거의 미적 규정을 넘어 총제적인 가치 형식적 검토와 사실 내용적 검토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한국미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 경성제대에서 우에노 교수의 지도로 박의현이 미학을 전공하였지만, 그의 졸업논문은 「피히데의 역사철학」이었으며, 국립박물관장을 맡았던 김재원의 경우는 독일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으니,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능력을 지닌 전문가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2) “각 시대의 미술을 비교하는 고유섭의 글에서 특히 조선시대를 가장 쇠퇴한 시기로 보는 시각은 그가 일본 관학자들이 가진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있으며, 이 점은 식민지 시대 학자로서의 그의 한계였다. 세키노 타다시는 『朝鮮美術史』에서 조선의 미술을 중화문화에서 받아들인 낙랑의 미술에서 발생하여 불교미술을 받아들인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절정에 달하였으나 고려시대에 다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 그리고 일제시대에 이러한 인식은 정규교육과정이나 일반적인 문화관계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투영되었고, 고유섭과 같은 학자들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영나, 「한국미술사의 태두 고유섭: 그의 역할과 위치」, 『미술사연구회』,2002, p.511~512 참조.
3) 고유섭, 「학난學難」,『고려시보』 (1935.6)
4) “잡다한 미술품을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계열과 순차를 찾아 세우고 그 곳에서 시대정신의 이해와 시대문화에 대한 어떠한 체관을 얻고자 한다.” 고유섭, 「고대미술 연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조선일보』(1937.1.4.)
5) 김인수, 「고유섭과 한국미학 – 고유섭 미학의 서구 근대미학적 배경」, 『동아시아 근대미학의 기원 – 한·중·일을 중심으로』, 인천문화재단, 2005, p.77.
김연지 | 중국에서 현대미술과 조소를, 한국에서는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space xx에서 큐레이터로 재작하며 공간의 기획과 운영을 총괄했으며, UNION ART FAIR도 함께 기획보조하였다. 한국 근현대미술 가운데 조명되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있으며, 현재는 작가들이 고민하고 실현할 수 있는 큐레이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