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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전시] 이의재 개인전 fineart-tile ceramics

2015-11-20(Fri) ~ 2015-11-29(Sun) [대관전시] 이의재 개인전 fineart-tile cera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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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사 소개

자연율(自然律)_161×81cm, mixed media, 2015

 

 

이의재 개인전

fineart-tile ceramics

 

기간 : 2015.11.20.(금) - 11.29.(일) / * 휴관 : 11.23(월)

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장소 :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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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이번 전시의 작품 의도는 회화의 공간 이탈을 시도한 작업입니다. 작품보존 관계로 실내에서만 전시 가능한 회화작품을 야외에 노출시키고 더 나아가 공공미술로서 회화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려는 작가의 의도입니다. “회화는 왜 실내에서만 전시를 해야 하는지?”라는 고민을 해 보았으며, 그 답을 도자기 기법에 회화를 접목시키는 방법을 시도 해 보았습니다.


작품 제작과정은 도자기 블록(block)& 타일(tile)을 제작하여 상감(분청토에 백토, 또는 백토에 옹기토 등)을 하고 다양한 색상의 안료와 흙(소지)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려서 작품을 구상하고 이미지를 옮기는 작업을 한 후에 1100 ̊C~1250 ̊C 가마소성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작품의 소재는 자연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는 “이뭣고”라는 화두를 여전히 들고 있으며, 기법 또한 직전의 작업에서도 해 왔던 작업입니다. 일본 동경 전시회(2002년)에서의 자화상과 인물시리즈에서 황토를 수비해서 썼던(배채법), 흙이라는 재료의 탐구가 있었기에 지금의 작업이 자연스럽게 옮겨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의 작업을 통해서 표현의 자유로움(입체,평면)과 공간의 해방감 그리고 가능성을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평면회화와 입체 그리고 실내. 외를 막론하고 본 작가의 의도 하에 재료와 소재,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새로운 도전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으며 재료의 탐구가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실패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간과 작업을 거의 6년여를 씨름했으며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이모든 것이 집약되어서 그림으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습니다. 결코 회화. 조각. 공예. 이러한 분야를 나누는 것은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릴뿐이며 자유롭고 다양하게 표현을 하고플 뿐입니다.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플 뿐입니다.

 

집약되고 절제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많은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꾸준히 질문하고자 합니다. 인간들이 부질없이 바쁘게 산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의자라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사유(思惟)라는 명제로, 쉬며 생각하며 살아가지 못함을 집어보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생각하는가. 느끼는가 ‘라는 시리즈로 관람객에게 질문을 해보기도 하고, 얼룩말의 시선이 관람객을 봄으로서 감상자 자신을 스스로 보는 시선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도 해 보았습니다. 한글시리즈는 디자인적인 느낌, 붓의 일획을 통한 서체의 느낌을 조형적으로 어우러지게 표현을 해 보았습니다.

자연 Ⅰ_176.5×88cm, mixed media,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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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와 공예, 붓질과 가마소성의 위계적 구분 넘어서기 _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

이 의재는 여전히 자연 안에 스스로를 세운다. 자연과 그것의 일환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물음을 여전히 거두어들이지 않는 태도다. 작가는 그것은 “이 뭣고”라는 화두로 요약하곤 했다. ‘이 뭣고’는 부질없이 바삐 사는 현대인의 애환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꿈이 빵을 조절하다 빵이 꿈을 억압하는 삶이 다시 회복해야 하는 차원에 관한 것이다.
이의재의 회화 세계가 이제껏 이 화두에 대한 존재적 반응의 일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연을 통해서 자신의 부분들을 통섭해 가는 여정, 그것이 곧 이의재 미학이 지향하는 궁극의 노선인 것이다. 이번 전시의 모티브인 의자 역시 그러한 맥락의 연장이다. 작가는 그 의자가 ‘쉼’이라는 일체 행위의 유보, 동작 정지를 통한 다른 시간의 확보, 곧 삶의 성찰을 위한 조건임을 환기시킨다. 사유의 부재는 쉼의 부재, 곧 자연과의 단절로부터 오는 사필귀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미 이의재의 회화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것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평화로운 침묵을 허용하는 매우 예민한 정지, 또는 실존의 진실을 대면하는 침묵의 대합실…” 나는 다시 한 번 버드(Byrd)장군의 일기의 한 부분을 재인용하고 싶은 마음이다.

 

“동작을 멈추고, 침묵에 귀기울였다. (…) 놀라운 평화와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흐름과 힘이 있었다. 소리 없는 조화 속에”

 

이 미학은 이의재의 존재론적 미덕과 괘를 함께한다. 굳이 용화사에서의 참선의 경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찾아 나섰다. 존재내적 부름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법을 연마해 볼거리를 늘리거나 한 시대의 고유한 정취를 기록하는 것에도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의재에게 작업은 곧 수행의 연장이다. 그에게 자연의 응시는 곧 수행이다. 수행자의 길과 화가의 길은 궁극적으로 무관한 두 갈래의 길이 아니다. 자연을 응시하는 시력과 내면의 소리를 듣는 청력 사이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깨닫는 경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일테면 조금씩 열리는 신비이기에 그것을 사는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다. 그렇기에 만점(滿點)이나 완성의 개념은 꿈이거나 기만일 뿐이다. 이의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 만으로서가 아니라 그림으로서 보여주어 온 소중한 작가들 가운데 한명이다. 

 


**

 “무엇을 보는가, 생각하는가, 느끼는가”의 질문을 관자에게 던지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통의 시도가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띠는 점이다. 얼룩말의 시선을 통해 관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경험을 갖도록 한다는 점도 그렇다. 그렇더라도, 무엇보다 이번 전시의 신선함은 “회화를 실내로 제한하지 않으리라”는 작가의 선언에 있다. 왜 그래야 하는가? 눈과 비에 노출되고, 풍상을 견디는 회화를 떠올리게 한 배경은 무엇인가? ‘화이트 큐브 벗어나기’는 작가의 자연주의 미학의 연장선상이다.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사적(私的)으로 발상되고, 화이트 큐브의 규범에 검열되고, 콜렉터의 수장고에서 여생을 보내는 예술품에 대한 의구심이 없다면 차라리 이상한 일이리라. 반면, 자연 어디에 칸막이, 곧 위계적 구분이 존재하는가. 강은 어디서 중단되고 바다는 또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가. 누가 들녘을 검열하고, 산을 사적 소유로 정의하는가?
구분과 분류, 범주와 경계는 거의 모두 욕망의 산물이고, 사전적 폭력의 산물이거나 사후적 폭력의 예고일 뿐이다. ‘동양(東洋)’은 서양의 독선으로부터 도래했고, 서양은 동양의 타자화된 욕망 안에서 신화화되었다. 서양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저변에선 삶과 자연에 대한 무지와 오해, 편견으로부터 야기된 일종의 정신착란적 증세가 목격된다. 모두 범주와 경계의 담론에서 비롯된 것들이기에 그렇다. 
회화와 공예를, 붓질과 가마소성을 위계적으로 구분하는 의도와 그로부터 도래해온 제도도 같은 맥락이다. 범주적 사유, 장르 간 위계를 폐할 필요가 그래서 제기된다. 이를 위한 이의재의 방법론은 회화와 도자기법을 접목하는 것이다. 회화는 주류로 작동해 온 장르의 하나일 뿐 결코 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담론은 모두 신화(神話)의 소관일 뿐이다. 작가는 말한다: “(회화, 조각, 공예 같은 식으로) 나누는 것은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릴뿐이며 자유롭고 다양하게 표현을 하고플 뿐입니다.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플 뿐입니다.”
예술이란 결국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열망의 부단한 표현과 소통 아니겠는가. 이의재는 관례화된 화폭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분청토에 백토를 섞거나 백토에 옹기토를 반죽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1100̊ ̊°C에서 1250 ̊°C의 가마에서 소성한다. 오랜 시행착오를 견디며 새로운 표현매체를 실험했다는 것이 의미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긴 시간 의탁해 왔던 지지대조차 기꺼이 멀리할 만큼 자기부정과 해방의 정신을 견지하는 한 예술가가 우리 앞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