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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초이스 리뷰Ⅰ] Analog and Digital Theatre <한국근대문학극장 : 술 권하는 사회, 탈출기>

  • 작성자관리자(admin)
  • 등록일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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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땀방울과 막걸리의 냄새

 

Analog and Digiatla Theatre <한국근대문학극장 : 술 권하는 사회, 탈출기>

 

김해진 공연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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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과 최서해의 1920년대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2014년 인천아트플랫폼 플랫폼 초이스의 첫 작품인 <한국근대문학극장 : 술 권하는 사회, 탈출기>는 여러 가지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가장 단순하게는, 왜 현진건과 최서해인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전윤환, 고홍진 두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니 청년의 몸을 매개로 2014년과 1920년대가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최서해의 <탈출기>는 연극을 통해 청년의 울분을 생생하게 터뜨렸고,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실제로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청춘이 무력함에 비틀거렸다. 두 작품 모두 1인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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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전윤환이 출연하고 고홍진이 연출한 <탈출기>가 먼저 문을 열었다. 음악과 함께 무대 왼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온 배우는 무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후들후들한 재질의 삼베 빛깔 바지와 재킷을 입었다. 마이크를 쥐고 웅크린 채 말을 하는가 했는데 마이크의 꼬리로는 마치 붓을 든 것처럼 글씨를 쓴다. 배우가 깔고 앉은 것은 커다란 종이. 배우는 다시 일어나 무대 오른편의 스탠드 마이크를 잡는다. 친구 ‘김군’을 호명하며 객석에 말을 건넨다. 그러다가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짓고 초가를 지어 식구들과 따뜻하게 지내고 싶었던 주인공이 척박한 땅과 온갖 핍박에 지쳐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공연은 이렇게 배우가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연기하는 부분과 이야기 밖으로 나와 김군에게 전후사정을 전하는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한 장면 안에서 두 가지 요소가 긴밀히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배고픈 시절, 남자는 임신한 아내가 자신을 보더니 먹고 있던 뭔가를 황급히 아궁이에 던져버리더라며 불쾌해한다. 아내가 먹던 것을 찾으려 씩씩대며 종이 뭉치들을 뒤진다. 그리곤 발견한 것이 귤껍질이었다고, 잇자국이 나 있었다고 말한다. 아내가 귤껍질을 주워 먹고 있었단 걸 알게 된 남자는 자신의 오해와 무력감 앞에서 ‘김군! 이때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적당할까.’라며 무릎을 꿇는다. 두부 장사를 할 적에는 두부가 되어가는 모양새에 식구들이 울고 웃었다고 했다. 남자는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 앞에서 서투르다.

 

옷에 묻은 검은 얼룩은 지식인의 먹물처럼 보였는데 극이 진행돼 갈수록 미처 하나의 형상이 되지 못하고 온몸에 파편처럼 튄 아우성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 얼룩과 더불어 배우에게 특히 집중하게 됐는데 왜냐하면 중국어를 외치는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구들장 고칩니다!’라는 뜻의 중국어를 반복해서 외치는 배우의 표정이 점차 그 뜻을 넘어서서 슬픔과 서러움이 묻어나는 절규로 바뀌었다. 생존을 위해 나의 언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를 가면처럼 얼굴에 쓴 이의 참혹함이 느껴졌다. 이 장면에 흐르던 감정이 마지막 장면에 힘을 실어준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직시하고 식구들을 버리면서까지 억압된 사회구조의 바깥으로 나가는 남자. 연극 <탈출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객석 가운데로 걸어 나가는 배우에게서 비장함이 엿보인다. 무대에서도 탈출하는 듯 하나 그림자가 무대에 얼마간 붙잡혀 있다. 객석을 지나는 배우의 얼굴에서 먹물이 섞인 검은 땀방울이 흐른다. 막일을 하는 이의 검댕이 아니라 분명 먹물처럼 보였다. 먹과 땀의 합일이라. 내게는 그것이 <탈출기>의 핵심적 물질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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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권하는 사회> 

 

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고홍진이 배우를 하고 전윤환이 연출을 한 <술 권하는 사회>로 넘어가본다. 배우와 연출을 서로 맞바꾸어 작업하는 형태가 흥미롭다. 무대에는 2013년 인천아트플랫폼 쇼케이스에서 신승렬 무대미술가가 선보인 노마드 씨어터의 조각 두 개가 놓였다. 노마드 씨어터가 이번에는 1920년대로 유랑을 떠난 셈이다. 무대를 전환하는 짧은 시간 동안 크고 누런 주전자에는 막걸리가 담겼다. 배우 고홍진은 한 관객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연극의 프롤로그를 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남편은 동경에 유학을 갔다. 아내는 긴 세월동안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배우는 능수능란하게 아내가 되었다가 남편이 되었다가 한다. 술도 마셨겠다, 역할 변이도 유연해서 마치 취권을 보는 것 같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이지만 ‘말해 무엇하나, 술이나 먹지!’ 와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아내는 이런 남편인데도 또 믿고 기다린다. 아내의 답답한 심정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바람이 부는 어느 밤, 아내는 남편이 온 것인가 하고 대문을 열지만 아무도 없다. 엎치락뒤치락 고민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문을 연 사이 남편이 빠르게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고 상상한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보니 어쩐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기대에 차 이불을 걷었으나 역시 아무도 없다. 이 에피소드를 연기하는 배우의 목소리와 표정에 그리움과 서러움, 허전함이 실린다.

 

배우는 동작 하나를 매개로 아내와 남편을 오간다. 양팔을 활짝 벌린 남편의 모습이었다가 이내 두 팔을 아랫배로 탁 모으면서 다소곳한 아내가 된다. 웃는 듯 우는 듯 소리를 내다가 점차 음색을 바꾸어 남녀의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배우의 한 몸 안에서 취한 남편의 양복 재킷을 벗기려는 아내와 벗지 않으려 하는 남편이 실랑이를 벌일 때, 배우는 양복을 손에 말아쥔 채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선 남편을 달래려 하고 또 연이어 손에 말아쥐었던 양복을 바닥에 내던지며 남편이 된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이 사회가 마음에 맞지 않고 또 어떻게 적응해야할지도 모르겠는 남편과 어리숙해 보이지만 이 모든 답답한 시간을 견디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서 연극은 체념해버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 또한 조명한다. 4월 6일(일) 공연에서는 특히 어린이 관객들이 배우의 빠른 변화에 웃음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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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대화>

 

1인극으로 만들어진 <탈출기>와 <술 권하는 사회>는 한 개인 안에서 갈등하는 여러 얼굴들을 보여주었다. 비장한 모습으로 사회구조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인간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을 함께 보여주면서 아날로그 앤 디지털 씨어터(Analog and Digital Theater)는 사회를 향한 개인의 태도를 고민하는 듯 하다. 두 편의 공연이 끝나고 ‘사회참여’를 주제로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사회참여’라는 말 보다는 1920년대에서 2014년으로 건너온 이 시대 개인의 무기력함이 더 먼저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 아내를 건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가부장의 무기력함은 구체적으로 와 닿았다. 또 한편으로는 아내들이 보였다. 두 작품 모두 아내는 무기력한 남편에게 종속돼 있는 처지지만 사회가 술을 권한다며 체념하지도, 이런 사회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남편을 위하며 귤껍질을 숨기고 이 밤에 어디를 나가려 하냐며 읍소한다. 주어진 참혹한 시간에 맞부딪친다. 혹은 내팽개쳐진다. 그리고 견딘다.

 

탈출하는 인물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 정직해서 안타까웠고 술에 취한 인물은 덧없어 보였다. 지금 이 때, 왜 근대문학을 극장에 들여왔는지에 대해 전윤환 연출에게 물었다.

 

“2013년 플랫폼 초이스에서 <미래도둑>을 공연할 때는 내가 연극으로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기술적 요소들이 많이 활용됐다. 그런데 요새는 공연의 형식적 완성도보다는 내가 이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을 그때그때 내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지난 1월, 혜화동1번지에서 젊은 연출가 시리즈로 이강백의 <파수꾼>을 공연했었다. 그때에 나는 ‘대한민국 사회가 지금 1970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1970년도 대한민국 작품을 끌고 나오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번에 1920년대 작품을 가지고 나온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20대 연출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2012년 혜화동1번지 5기동인이 꾸렸던 봄페스티벌 ‘해방공간’이 떠올랐다. 1940년대 희곡들을 재해석해 올렸던 그때의 공연팀들은 해방과 비해방의 구별이랄 게 없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꼴라주했었다. 현 사회가 퇴행하고 있다는 예술가들의 자각이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연극 <탈출기>와 <술 권하는 사회>에서 필자가 본 것은 사회구조를 지각하며 맞서는 개인의 장중함과 자기가 처한 현실을 회피하는 개인의 우스꽝스러움이었다. 아날로그 앤 디지털 씨어터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것이 다음에는 어떤 구체적인 지점에서 연극으로 응결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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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해진 haejinwill@gmail.com

 

1979년 서울 생.

제4회 플랫폼문화비평상 공연 부문 당선.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문학․비평․연구 부문 4기 입주예술가.

최근 글로 <비와 악(惡)에 젖어버린 남자들> <사탕 물고 쓴 커피를 마시는 기분>, 희곡 <마지막 짜지앙미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