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네트워크, 꽃을 창조하다
Inessential network creating flowers
January 7 fri.- 20 thu. 2011
Opening January 7 fri. 5 p.m.
서울 쿤스트독 Gallery
인간의 역사와 함께 미술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미술의 역사와 함께 미술가는 창조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고자 했다. 저 먼 신화의 시대, 인간 아라크네Arachne와 여신 아테나Athena와의 직조 시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인간의 창조자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지난한 역사의 시작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시합에서 여신은 인간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나 거미의 수준으로 떨어뜨리고야 만다. 이렇듯 필사의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미술가의 운명은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의 창조자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절대적 창조자로서의 신은 그를 닮은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유사한 지위를 선사한다. 미술가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미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권력에 의해, 자본에 의해 그리고 폐쇄적 사회구조에 의해 부인되어 왔으며 때로는 그 존재 가능성마저 지워져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이제 미술가인 나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복원하려 한다. 허나 그것은 또 다른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한다. 현대의 미디어를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당연히 관람객의 참여를 충분조건으로 상정한다. 소극적 창조자로서의 미술가라는 필요조건이 관람객의 참여라는 충분조건으로 인해 완성되는 형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절대적 창조자로서의 미술가의 의미를 부정하는 셈이다.
관람객에게 신적인 창조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신으로부터 기인한 창조성은 환상illusion이라는 가상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또 다른 창조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 구조를 띤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각의 개인이 가진 창조 가능성을 탐색하는, 민주적인 시각예술의 형태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
‘소통’은 이제 대개의 현대미술 혹은 문화가 지향하는 가치다. 이제 ‘소통’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내는지가 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에서의 소통이 조형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의 미적 가치를 인식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예술에서의 소통은 단순한 인식의 단계를 넘어서 그/그녀가 가진 거개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여 작가/작품/공간과의 정서적?인식적 공감을 도출하는 단계를 지향한다. 이번 전시는 정원garden의 형태를 띤다. 간단없이 흩어진 미디어는 전자 정원의 형태로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기다린다. 원통의 형태를 이룬 작품의 양쪽 끝에는 인간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설치되어 관람객의 참여로 반응한다. 주지하듯이 원circle은 생명, 부활, 모태 등을 상징하는데, 양쪽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꽃의 이미지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움직임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얻게 된다.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생명의 감지와 그로 인한 움직임은 그 상호성으로 인하여 매 순간의 완성에 닿는다. 그러나 그 완성은 미디어의 속성대로 임시적이며 불완전성을 띠는 운명이다. 이러한 시뮬라크르 의 속성 역시 찰나적인 뉴미디어아트의 속성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의도이다. 결국 가상의 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지만, 실체 없는 허상과도 같으며, 이는 뉴미디어아트의 숙명과도 같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양승수